블로그 홈
소개

아토포스적 도시, 토포스적 예루살렘

아토포스(atopos)적 도시, 토포스(topos)적 예루살렘

서양 건축사의 원류를 거꾸로 좇아가다 보면 첫 번째 종착지가 르네상스와 바로크일 것이며,
두 번째 종착지는 로마네스크와 고딕, 세 번째 종착지는 4세기 경 로마의 (구) 성 베드로 성당(Old St Peter's Basilica)과 예루살렘의 성묘 성당(Jerusalems Saint Sepulcre)에 이르게 된다.
(두 성당 모두 현재 건축물과 당시 건축물은 상이하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중요한 장소적 의미를 부여받는 두 성당이지만, 장소의 메타포적 감도는 예루살렘의 성묘 성당이 압도적이라 할 수 있다. 320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인 헬레나가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당시 예수의 무덤 자리엔 비너스 신전이 자리 잡고 있었다.
30년 경 예수의 십자가 처형, 76년 로마의 예루살렘 파괴 후 기독교인들 대부분 예루살렘을 떠났고, 132년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예루살렘을 이교도 중심의 로마 도시로 재건했기 때문이다.
교부 제롬 역시 당시 예루살렘에는 기독교인이 거의 없었음을 확인해 주고 있다.
성묘 성당을 비롯한 성지 예루살렘의 당시 여러 성당은 제국의 황제 큰 사모님 후광 효과로 4세기경 신도시 건설 수준의 속도로 우후죽순 자리 잡게 된다.
예수의 무덤 위에 지어진 성묘 성당 역시 정확한 고증의 결과와 무관하다.
종교적 관점에서 예루살렘은 토포스(Topos)적으로 신앙의 정념은 포드주의를 방불케 하는 광기적 메타포를 대량 생산, 유통하였으며, 역사적 관점에서 예루살렘은 아토포스(Atopos)적으로 방황하는 신앙의 표상일 뿐이다.
구시가지 중심 공간인 템플 마운트(Temple Mount) 위 바위 사원(Dome of the Rock)은 7세기경 이슬람 건축물이며, 골고다(Golgotha) 혹은 갈보리(Calvary) 언덕이란 장소성 역시 화가들의 상상에 의지해 인식되는 것이 전부이다.
*** 예루살렘에는 예루살렘이 없다.
76년 로마의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파괴한 후 기독교인들은 박해를 피하고자 예루살렘을 떠나 전 세계로 흩어짐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기까지 예루살렘은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이교도들이 주로 거주하는 도시
기독교인들에게 잊혀진 도시
— 교부 제롬에 의하면 그 당시 예루살렘에는 기독교인이 없었음
132년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예루살렘을 이교도 로마 도시로 재건
135년 무덤이 있던 자리 이교도 성소 세움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 권력자들 대거 교회로
320년 콘스탄티누스 어머니 헬레나가 예루살렘을 방문
— 정확한 고증이나 검토도 없이 교회 재건
— 당시 예수님 무덤 터는비너스 신전, 설령 예수 무덤이 있다 하더라도 이미 훼손되었을 것이지만, 헬레나의 명령에 따라 성묘교회(Holy Sepulcher)가 건축
— 베들레헴의 예수 탄생 교회(the Church of the Nativity) 터는 아도니스 신전, 증거나 확증도 없이 기존에 있던 신전을 부수고 기념 예배당 건축
*** 예수 십자가 처형, 골고다(Golgotha) or 갈보리(Calvary) 언덕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예수는 예루살렘 성벽 바깥 어딘가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 되었다.
— 성경은 골고다(Golgotha) 혹은 갈보리(Calvary) 언덕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예로부터 사용된 공개 처형장 정도로 추정) 고고학적으로 위치는 정확하지 않다.
— 16세기 북유럽 르네상스 화가 피터 브뤼겔(Pieter Bruegel)과 그의 아들의 각각 ‘갈보리 언덕으로 가는 행렬(The Procession to Calvary)’과 ‘십자가 처형(The Crucifixion)’
*** 현재의 예루살렘

*** 장소의 메타포, 토포스(topos)와 아토포스(atopos)

출처 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