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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희의 히스토리에장보고와 청해진, 왕건으로 이어지다│인터비즈
인터비즈
・ 2019. 4. 3.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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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희의 히스토리에(Historie)(13) 바다에서 쌓은 힘, 세상을 바꿨나 장보고가 암살 당하고 몇 년 뒤 (851년경) 청해진은 폐쇄되었다. 그러나, 불과 50년 뒤 왕건과 견훤의 후삼국 쟁패에서 서남해 해상세력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청해진 사람들의 돈과 힘이 왕건으로 이어진 것이다. 왕건 스스로가 장보고와 비슷한 예성강 지역의 해상세력이었으니, 바다의 힘이 새로운 시대를 연 셈이다. 고대-중세사 연구자들의 업적에 경영의 상상을 얹어 이 부분에 대해 생각해보자. 신라 말기 민란과 군벌, 토착세력의 기회 완도 청해진 유적(사적 제308호) 전경사진 / 출처 장보고기념관 장보고는 당나라와 일본에서 활동하던 신라인들의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한반도 서남해 지역의 다양한 해상세력을 끌어들여 독자적인 군사적, 경제적 기반을 갖춘 번진(藩鎭)을 구축하고 일정한 자치권과 대외무역 대표권을 얻어냈다. 왕경인 금성(金城=경주)이 동쪽에 있는 신라로서는 국내의 조세 운송과 국제 교역을 위해 서남해 바닷길이 더욱 중요할 수밖에 없었는데, 장보고와 청해진 덕분에 해적들의 약탈 문제를 해소함으로써 안전하고 빠른 바닷길을 확보할 수 있었다.서남해 지역은 배후지의 농업 생산을 배경으로 조세 수취와 조운(漕運)의 거점이었다. 또, 도서지역의 목축(특히 말 농장), 제염(製鹽) 등 당대의 고부가가치 산업이 모인 곳이었다. 장보고와 청해진이 없어졌다고 이런 사업 활동들이 모조리 사라졌을 리는 없다. 무역활동 역시 (해적활동과 맞물린 밀무역의 비중이 크게 늘었겠지만) 어떻게든 계속되었을 것이다.장보고 이후 일본에서는 신라 해적들의 활동이 크게 늘었다. 원래 9세기 동아시아의 무장 상인 집단은 중앙의 통제력이 약해진 공간에서 경제력과 무력을 바탕으로 중앙귀족과 지방 군벌의 비호 아래 도적 떼와 토호들을 끌어들여 상인과 해적의 경계를 넘나들었던 존재들이다. 신라 조정이 장보고를 통해 서남해의 여러 집단들을 일종의 ‘관허(官許) 조합체제’로 묶은 면이 있는데, 청해진이 사라진 상황에서 새롭게 전개되는 신라 말기의 정치적 상황은 이들에게 새로운 생존 전략을 찾게 만들었다. (조합체제가 깨지고 소속 회사들이 개별적으로 투자자를 영입해서 경쟁과 협력에 나서는 것과 비슷하다.)신라 말기 들어 대농장과 수 천의 사병(私兵)을 가진 진골 귀족들이 권력투쟁을 벌이면서 왕실의 지배력은 쇠락한다. 822년 김헌창의 난과 이어지는 왕위쟁탈전의 과정이 그러한데, 진골 귀족들은 지역의 지배력을 확보하고 병력을 동원하기 위해 현지 토착세력들의 협력이 필요했고, 이들과 서로 맞물려 지배 권력을 형성해 간다. (장보고의 힘을 빌려 신무왕을 즉위시키고 이어서 무진주 토착인 염장을 통해 장보고를 제거한 김양(金陽)의 사례에서도 일부 드러난다.) '오대산사 길상탑지'에 기록된 통일신라 말기의 혼란상. 합천 해인사 길상탑에는 이를 포함해 4매의 탑지가 봉안돼있었다. 여기에는 진성여왕 대에 전쟁으로 나라가 극심한 혼란에 빠진 모습과 전란 중 사망한 승군들의 넋을 위로하며 탑을 세운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 게티이미지뱅크 편집 신라 말기에 닥친 자연재해와 기근은 국가체제를 급속하게 무너뜨린다. 중앙과 지방의 지배층이 모두 나서서 세금을 걷으니 살 곳을 잃은 유민(流民)들이 늘어나고 도적떼가 된다. 민란(民亂)과 왕위쟁탈전에서 이탈한 군인들이 편입되니 세력은 더 커진다. 돈과 칼의 힘이 앞서는 세상은 준비된 자에게는 기회가 된다. 민란에 맞서려고 군대를 모으고, 혹은 민란에 편승하거나 흡수해서 세력을 키우면서 이합집산의 ‘전략 게임’이 시작된다. 유능한 진골 귀족은 토착민들과 손잡고 군벌이 되고, 힘과 돈이 있는 토착 호족은 도적 떼와 손잡고 스스로 ‘장군’ ‘성주’를 자처하고 나선다. 진성여왕 대에 후삼국 쟁패가 전개된 과정이다. 왕건 vs. 견훤, 서남해의 선택 태조 왕건 역을 맡은 배우 최수종(좌)과 견훤 역을 맡은 배우 서인석(좌) / 출처 역사저널 그날 왕좌의 게임 <견훤 vs 왕건>편 후삼국 쟁패의 과정에서 왕건과 견훤은 서남해의 핵심 거점인 나주와 강주(康州=진주)를 놓고 치열한 공방을 벌이는데, 이 과정에서 지역의 토착 해상세력들의 역할이 드러난다. 패서(浿西= 예성강 서쪽 황해도 지역)를 근거로 등장한 서해의 유망주 왕건 일가는 궁예에 귀부(歸附) 했다가 그를 축출하고 후삼국을 통일한다. 장보고가 죽고 청해진이 폐쇄된 것이 851년이니, 나주의 토착 호족들이 왕건에게 귀부하기까지 50년, 후백제가 망하고 신라가 고려에 귀부하기까지 걸린 기간은 80년이 채 안 된다. 청해진의 유산이 남아 있을 수 있는 시간이다.고대-중세사 연구자들은 장보고의 해상세력이 후삼국 쟁패기와 고려 건국으로 이어질 가능성에 관심을 가져왔다. 특히, 나주는 후백제 지역에 있으면서도 왕건이 궁예 휘하에 있던 903년 그에게 귀부한 이래 후삼국 통일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근거지가 되었다. (산둥반도 지역이 미군을 받아들이고 군사기지까지 허용한 셈이다.) 왕건은 903년~918년 기간 시중으로 있던 1~2년을 제외하고는 나주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군함을 건조하고 도서지역의 해적을 제압해서 근거지를 확립해 견훤에 맞서는 한편, 개인적으로는 궁예의 의심과 견제를 피할 수 있었다. 935년 4월엔 아들 신검의 정변으로 금산사에 유폐되었던 견훤이 나주를 통해 바닷길로 왕건에게 귀순하기도 했다. 이런 일들은 현지 토착민들의 후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왕건이 신혜왕후 정주(貞州) 류씨(柳氏)씨에 이어 나주 오씨(吳氏)를 둘째 부인 장화왕후로 삼은 사실로도 입증된다. (장화왕후의 아들은 고려 2대 왕 혜종(惠宗)이 된다.) 왕건은 현재 여수, 순천 지역의 토착 호족들의 협력을 얻어내면서 서남해에 더욱 탄탄한 기반을 갖추게 된다. 서남해의 토착 호족들이 견훤의 공격에 시달리면서도 왕건에게 협력한 이유는 무엇일까? 연구자들은 이들이 당나라와의 교역을 경제적 기반으로 삼는 입장에서 왕건의 해상봉쇄를 풀어야 하는 현실적 이유가 있었고, 해외 교역 과정에서 이미 왕건 가문과 일정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는 가설을 제기한 바 있다. 해양활동을 영위하는 집단들 사이의 강한 유대감이나 상호 이익배분 방식이 문화적으로 맞았다면, 토착 세력의 마음을 얻는 데 왕건이 더욱 유리하다. 태조 왕건과 부인 장화왕후 오 씨의 이야기를 담은 동상. 나주에 출전해 머물렀던 왕건의 모습이다 / 출처 나주 시청 내륙 농업지역인 무주(武州)와 해양을 기반으로 하는 나주 사이의 첨예한 이해대립을 배경으로 들기도 하는데, 서남해 지역의 목축, 제염 등 경제활동이 지역 외부와의 교역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타당한 면이 있다. (지금도 무역, 금융을 해외에 개방하는 정책에는 치열한 이해대립이 벌어지는데, 당시에는 칼을 들고 있었다.)왕건은 나주를 근거지로 진도(珍島) 등 인근의 서남해 섬들을 장악하여 소금, 말과 같은 전략물자를 조달하는 한편 송악과 나주를 잇는 해상운송과 군사작전이 가능한 체제를 만들었다. 무주 내륙과 나주 해안이 다르듯이, 나주 지역 군소 해상세력의 정치적 입장 또한 다양해서 압해도(押海島=현재 신안)와 인근 도서를 근거로 하는 능창(能昌)의 경우 후백제 편에서 왕건에 맞서기도 했다. 견훤의 해군력 역시 막강했다. 왕건이 내륙의 분란을 수습하는 사이 나주를 고립시키는 한편 강주를 장악하고 나아가 백령도 지역에까지 손을 써서 고려의 측면을 위협했다. 이에 귀양 중이던 왕건의 핵심 인사 유금필이 현지민들과 함선을 동원해 맞섰다는 사례도 나온다. 1100년 전 바다를 무대로 한 사람들의 힘이 느껴지지 않는가?강주는 일부 호족세력이 왕건에 귀부하려다 실패하고 견훤의 세가 우세했던 지역이다. 청해진 당시 선박의 제작과 수리가 이곳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설도 있듯이 독자적 기반을 갖고 있어서, 830년 무렵 일본에 독자적으로 사절을 파견한 기록이 있다. 후삼국 쟁패기에도 지역의 실세 왕봉규가 독자적 세력으로 중국 후당(後唐)과 교류한 일이 있다. 당이 망하고 대륙이 분열된 상황에서 앞선 정보력으로 길을 연 것은 청해진으로 상징되는 국제적 네트워크와 역량이 뿌리가 된 것은 아닐까?후삼국 쟁패기의 나주나 강주의 토착 호족들은 조부(祖父) 대에서는 장보고와 함께 활동하던 사람들이다. 당시에도 예성강 일대의 상인들과 거래가 있었을 테니 그 관계는 뿌리가 깊을 수도 있고, 중국 곳곳의 신라방 역시 교류의 장이 되었을지 모른다. 견훤이 탈출해서 왕건에게 가는 데 도움을 준 선종 계열의 승려들이나 왕건을 보좌했던 최지몽 같은 지식층 문사(文士)들 역시 지역 호족들과 교류하며 서남해의 교역로를 통해 문물을 받아들이고 성장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또 하나의 해상세력, 왕건의 경우 9세기 초중반의 동아시아 국제 교역은 장보고가 장악했던 서남해 교역로 이외에도 서해 북부 연안을 거쳐 발해만으로 통하는 경로와 경기도 남양만 당항성(= 현재 수원 화성)에서 황해도 옹진반도를 거쳐 중국 산둥반도로 연결되는 서해 중부 횡단 항로가 있었다. 신라는 이들 교역로의 핵심지역에 청해진, 패강진(浿江鎭), 당항진(黨項鎭)을 두어 관리했는데, 장보고의 활동으로 청해진이 부각되었지만 당항성 역시 삼국시대 이래 줄곧 중국 대륙과 연결되는 관문으로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 9세기 동아시아 교역로 신라와 당의 관계가 개선되고 서해 북부 지역에 대한 지배력이 개선되면서 패강진 인근의 개성 지방에서 해외 무역을 비롯한 상업활동이 성장하는데, 왕건의 가문은 이 패서(=예성강 서쪽) 지역의 해상세력으로서 힘을 키웠다. 왕건의 조상에 대한 기록들은 신화에 가깝지만, 당시의 사회상에 비추어 보면 대략 ‘군사적, 상업적 재능을 가진 선조들이 유력자들과 결혼을 통해 경기도, 황해도 지역에서 기반을 잡았다’는 얘기가 된다. (결혼은 ‘상호 인질’의 성격을 가진, 동맹을 유지하는 효과적인 안전장치이고, 2세를 통해 ‘동업’으로 진화한다.)지도를 보면 청해진은 연안을 따라 뱃길로 당항성과 패서 지역으로 연결되며, 발해 상인들의 활동과도 만나게 된다. 중국 대륙의 주요 상업 거점을 통해서도 쉽게 교류가 이뤄지게 된다. (왕건의 조부 작제건(作帝建)은 장보고와 교류하며 성장했을지도 모른다.) 청해진의 네트워크가 무너지고 곳곳의 지방 세력이 할거하는 상황은 당항성과 패서 지역의 사람들에게 기회이자 위협이 된다. 왕건 가문은 이를 기회로 삼아 내륙의 토착세력과 유민들을 모아 힘을 키우던 궁예에게 귀부하여 그 세력의 일각을 이루고 나아가 새 왕조를 세우게 된다.항구와 국제도시는 서로 경쟁하며 발전한다. 신라 왕경인 경주가 더 이상 세상의 중심이 아니고, 곳곳의 ‘장군과 성주’들이 무기와 사치품을 갖추고 전쟁 물자를 조달하려 나서면 예성강과 당항성에는 돈과 사람이 더 모이게 된다. 베트남 전쟁에서 방산업체들은 물론 건설, 무역, 해운, 운송 업체들이 큰돈을 벌고 베트남의 주요 항구들이 호황을 누린 것과 비슷하다. 왕건은 이렇게 확보한 경제력으로 주민들을 먹여 살리며 민심을 얻었다. 벽란도는 늘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고려가 개성에 도읍을 정하고 서경(=평양)이 다시 번성하면서 예성강 지역의 벽란도는 중국은 물론 서역의 무역상들이 모여드는 최고의 국제무역항이 된다. 역사학계 일각에서는 왕건 가문의 예성강 지역을 나주, 강주와 더불어 3대 해상세력으로 평가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렇다면 왕건은 바다에서 쌓은 힘을 모아 새로운 시대를 연 셈이다. 장보고는 하늘에서 왕건과 벽란도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필자 박찬희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필자 약력- 서울대 경영대 학·석사, 미국 하버드대 경영학 박사- 대우그룹 회장 보좌역, 대통령 정책기획위원 역임- MBC 라디오 <손에 잡히는 경제>, TV조선 <황금펀치> 기획 및 진행※ 히스토리에(Historie)는 역사(History)를 뜻하는 독일어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을 보필하던 마케도니아의 장군 에우메네스의 삶을 다룬 역사 만화 작품명(이와아키 히토시 作)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인터비즈 박은애 정리inter-biz@naver.com◆ 장보고와 청해진 시리즈① 장보고, 동아시아 경제권의 허브를 만들다② 장보고 암살 이후, 청해진의 돈과 힘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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