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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 명이 사는 도시, 에도의 수수께끼 - 리뷰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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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의 막부 소재지. (위키피디아)쌀은 기특한 식물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도시계획을 기초로 만들어진 에도는 17세기 말~18세기 초 겐로쿠 문화기에 인구 100만 명의 세계 최대 도시로 발전했다. 당시 런던이나 파리는 40만 명의 도시였으므로, 에도는 월등히 거대한 도시였다. 지금도 도쿄를 중심으로 하는 수도권(1도都 6현縣)은 인구 3500만명이 넘는 세계 최대의 광역도시다.인구가 많다는 것은 과밀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 유럽과 비교했을 때 ‘과밀하다’는 일본의 이미지는 도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유럽을 여행하면 광활한 전원 풍경을 즐길 수 있지만 일본은 어디로 여행을 가더라도 협소한 가옥이 세워져 있는 등 오밀조밀한 느낌이 있다. 왜 일본은 오밀조밀한 것일까.유럽의 전원풍경을 보면, 광활한 밭이 한 쪽 면에 펼쳐져 있고, 마을은 아득하게 보일 뿐이다. 이를 잘 따져 보면, 마을의 생활을 영위하는 데 넓은 밭을 필요로 했다는 의미다. 반면 일본 에도시대의 마을을 보면 마을과 마을 사이의 거리가 가깝다. 일본에서는 적은 농지로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었던 것이다.16세기 전국시대의 일본은 똑같은 섬나라인 영국에 비해서 이미 6배나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만한 인구를 지탱했던 것은 ‘논’이라고 하는 시스템과 ‘벼’라고 하는 작물이었다.유럽에서는 감자나 콩류 등 여름작물을 재배하는 밭과 밀을 재배하는 밭, 작물을 재배하지 않고 쉬게 묵히는 휴한지 등 3개로 나눈 뒤, 돌아가면서 토지를 이용하였다. 즉, 밀은 3년에 1번밖에 재배할 수가 없었다. 이 농법은 삼포식三圃式 농법이라고 하는데, 3년에 한 번 밭을 쉬게 하지 않으면 지력地力을 유지할 수 없었다.이에 반해 일본의 논에서는 해마다 벼를 기를 수가 있다. 일반적으로 작물은 연작連作[같은 땅에 같은 작물을 해마다 심어 가꾸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매년 재배할 수 있는 벼는 실로 기특한 식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옛날에는 벼를 수확한 후에 밀을 재배하는 이모작을 행했다. 유럽에서는 3년에 한 번밖에 밀을 재배할 수 없었지만 일본에서는 1년 동안에 벼와 밀 양쪽을 수확할 수 있었다.게다가 벼는 작물 중에도 유난히 수확량이 많다. 뿌린 씨앗의 양과 수확해서 얻은 곡물의 양의 비교를 수확배율收穫倍率이라고 하는데, 15세기 데이터에 따르면 밀은 5배 밖에 되지 않았다. 한 알의 씨를 심으면 고작 5알밖에 안 되는 밀을 얻었다는 얘기다. 이에 비해 15세기의 벼의 수확배율은 20배였다.지금도 밀의 수확배율은 16배지만, 벼의 수확배율은 무려 130배에 달한다. 수확량이 많지 않은 유럽에서는 넓은 면적의 땅에서 농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 광활한 전원 풍경에는 그러한 이유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일본의 논은 손이 가면 갈수록 수확량이 많아진다. 일본인은 되는대로 면적을 넓히는 것 보다 손질을 해서 벼농사를 짓는 방법을 선택했다. 이 벼농사의 특징이 일본의 과밀함을 낳았고 일본인의 내향적인 국민성을 양성했다고 한다. 무사가 동쪽 지방에 구축한 100만 도시 에도그러나 단순히 인구 100만의 도시라고 해도, 간단하게 만들어질 리 만무하다. 우선 100만 명이 마실 수 있을 만큼의 물이 필요하다. 그리고 100만 명이 굶지 않도록 식량을 모아야 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사람이 살고 끼니를 먹으면 ‘나올 것’이 나온다. 이 100만 명분의 배설물을 처리하는 인프라 시설이 정비되어야 비로소 도시가 성립된다.19세기 런던에서는 도시를 흐르는 템스 강에서 심한 악취가 풍기고, 전염병이 만연했다. 하수도 정비가 인구증가를 따라가지 못했던 것이다. 세계를 선도하는 문명국가인 영국조차 인구증가에 따른 위생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런던보다 훨씬 인구가 많았던 에도에서는 왜 강이 오염되지 않고, 전염병이 만연하지 않았던 것일까.근대 농예 화학의 아버지이며, 식물의 성장에 필요한 3요소(질소, 인산, 칼륨)을 밝혀낸 19세기의 독일 화학자 유스투스 폰 리비히는 일본의 어떤 시스템에 주목하고 이를 절찬絶讚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의 분뇨를 농업에 이용하는 것이었다. 다이묘 저택의 인분뇨거름은 매우 비쌌다에도의 인구가 증가하자 근교에서는 논과 밭이 활발하게 개척됐고, 채소의 생산이 증가했다. 상대적으로 오래 보존할 수 있는 쌀은 멀리서 운반해 올 수 있지만, 쉽게 상하는 채소는 에도 근교에서 생산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농민들은 에도의 도시에서 사람의 똥오줌을 모아 인분뇨거름으로 만들었다. 농사를 지으려면 비료가 필요했기 때문이다.인분뇨거름은 ‘금비’金肥로 불리며, 농민들이 돈을 주고 사는 비료였다. 사람의 똥오줌은 결코 폐기물이 아니라 가치 있는 자원이었던 것이다. 인분뇨거름은 비료로 쓰이고, 재배된 채소는 사람들이 먹는다. 이 우수한 순환형 시스템에 의해, 에도는 인구 100만 도시를 가능하게 했다.인분뇨거름은 상품으로 유통되며, 전문적으로 인분뇨를 퍼내는 ‘거름 도매상’이란 업자가 있을 정도였다. 에도의 초닌町人[상인]들은 나가야長屋[에도시대의 단층 연립 주택]에 살고 있었는데, 나가야에는 공동 화장실이 있고 그 집에서 나오는 분뇨는 집주인의 것으로 정해져 있었다. 집주인은 이 인분뇨를 거름으로 팔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수익은 나가야의 집세보다도 많았다고 한다. 흔히 라쿠고落語[일본 전통 만담]에서는 나가야의 상인이 집세를 체납하는 얘기가 나오지만, 실제로는 집주인에게는 집세를 받는 것보다 그들이 공동 화장실을 써주는 것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인분뇨거름은 그 품질에 따라 가격이 매겨졌다. 신분이 다른 만큼 품질이 다르기 때문에 신분이 높은 집의 분뇨일수록 더 비싸게 거래됐다. 가장 가격이 비쌌던 것은, 다이묘 저택의 인분뇨거름이었다. 다이묘 저택의 인분뇨거름은 ‘킨판きんぱん’이라고 불리며 특별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인구 100만 도시의 인분뇨가 비료로 훌륭하게 이용되면서 에도 근교에서는 농업이 활성화됐다. 하천도 더러워지지 않고 아름답게 보존됐다. 어째서일까.농지에 처리된 많은 비료분은 강으로 흘러가 에도만으로 흘러들었다. 그런데 이 영양분은 하천을 더럽힐 정도의 많은 양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영양분을 먹이로 하는 플랑크톤이 발생하고, 그 플랑크톤을 먹으며 많은 물고기들이 자랐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풍부한 어장이 ‘에도마에江戶前’라고 불리는 바다였다.‘아깝다もったいない’라는 일본어가 있지만, 에도시대의 일본인은 모든 것을 버리지 않고 재활용하는 순환형 사회를 실현하고 있던 것이다.완전 재활용의 식물국가였던 일본에도시대가 되자 새로운 논이 개척되면서 쌀의 증산이 이뤄졌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쌀 생산이 늘면서 쌀의 가치가 하락하고 말았다. 쌀 본위의 경제에서는 쌀이 화폐와 같은 것이었으므로, 쌀의 가격이 내려가면서 번藩의 수입도 감소했다. 그래서 여럿 다이묘들은 환금성이 높은 상품 작물을 장려하는 경제정책을 실시했다.밀랍을 채취해 양초를 만들었던 옻나무과의 황로. (위키피디아)예를 들면 의류의 재료가 되는 섬유를 뽑기 위해 아욱과의 목화나 모시과의 삼麻을 재배하거나, 뽕나무를 재배해 누에를 사육, 비단을 생산하기도 했다. 게다가 의류를 염색하는 염료로서 여뀌과의 쪽이나 국화과의 잇꽃을 재배했다. 종이의 재료로 재배한 것은 뽕나무과의 닥나무나 팥꽃나무과의 삼지닥나무였다.에너지 자원은 어땠을까. 기름을 얻기 위한 식물로 유채과의 유채씨나 차조기과의 들깨를 재배했다. 옻나무과의 황로黄櫨에서는 밀랍을 채취해 양초를 만들었다. 이와 같이 에너지조차도 식물로부터 얻고 있었던 것이다.에도시대 일본은 무역을 제한한, 이른바 ‘쇄국 상태’에 있었다. 다시 말해 식량은 물론 국내에서 자급하고 있었다는 얘기다.현재 일본의 에너지 자급률은 고작 4%에 불과하다. ‘의식주’의 경우, 식량 자급률은 39%, 주택을 짓는 데 필요한 목재 자급률은 29%. 의류 자급률은 거의 0%이다. 에도시대의 일본은, 이 모든 것을 자급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 모든 것을 식물로부터 얻어 만들어내고 있었다. 다이묘들이 일구어 낸 나라는 다름 아닌 ‘식물국가’였던 것이다.오늘날 우리들은, 에너지는 물론이거니와 생활용품, 건설자재 등 생활에 관련된 온갖 것들을 한정된 화석연료를 가지고 만들어내고 있다. 몇 억 년 전이나 되는 옛날에 만들어진 석유 등 화석 연료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한편 에도시대에는 필요한 모든 것을 식물로부터 만들고 있었기 때문에 자원이 고갈되는 일 없이 영속적으로 재생산이 가능했다. 식물로 모든 것을 만들어 낸 에도시대의 사람들은 낡아빠진 것일까. 한정된 자원을 탕진하고 있는 현대인에 비교해 볼 때 과연 누가 에도시대의 사람들을 뒤떨어져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이나가키 히데히로  review@bookpot.net<저작권자 © 리뷰 아카이브,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1
에도의 막부 소재지. (위키피디아)쌀은 기특한 식물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도시계획을 기초로 만들어진 에도는 17세기 말~18세기 초 겐로쿠 문화기에 인구 100만 명의 세계 최대 도시로 발전했다. 당시 런던이나 파리는 40만 명의 도시였으므로, 에도는 월등히 거대한 도시였다. 지금도 도쿄를 중심으로 하는 수도권(1도都 6현縣)은 인구 3500만명이 넘는 세계 최대의 광역도시다.인구가 많다는 것은 과밀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 유럽과 비교했을 때 ‘과밀하다’는 일본의 이미지는 도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유럽을 여행하면 광활한 전원 풍경을 즐길 수 있지만 일본은 어디로 여행을 가더라도 협소한 가옥이 세워져 있는 등 오밀조밀한 느낌이 있다. 왜 일본은 오밀조밀한 것일까.유럽의 전원풍경을 보면, 광활한 밭이 한 쪽 면에 펼쳐져 있고, 마을은 아득하게 보일 뿐이다. 이를 잘 따져 보면, 마을의 생활을 영위하는 데 넓은 밭을 필요로 했다는 의미다. 반면 일본 에도시대의 마을을 보면 마을과 마을 사이의 거리가 가깝다. 일본에서는 적은 농지로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었던 것이다.16세기 전국시대의 일본은 똑같은 섬나라인 영국에 비해서 이미 6배나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만한 인구를 지탱했던 것은 ‘논’이라고 하는 시스템과 ‘벼’라고 하는 작물이었다.유럽에서는 감자나 콩류 등 여름작물을 재배하는 밭과 밀을 재배하는 밭, 작물을 재배하지 않고 쉬게 묵히는 휴한지 등 3개로 나눈 뒤, 돌아가면서 토지를 이용하였다. 즉, 밀은 3년에 1번밖에 재배할 수가 없었다. 이 농법은 삼포식三圃式 농법이라고 하는데, 3년에 한 번 밭을 쉬게 하지 않으면 지력地力을 유지할 수 없었다.이에 반해 일본의 논에서는 해마다 벼를 기를 수가 있다. 일반적으로 작물은 연작連作[같은 땅에 같은 작물을 해마다 심어 가꾸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매년 재배할 수 있는 벼는 실로 기특한 식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옛날에는 벼를 수확한 후에 밀을 재배하는 이모작을 행했다. 유럽에서는 3년에 한 번밖에 밀을 재배할 수 없었지만 일본에서는 1년 동안에 벼와 밀 양쪽을 수확할 수 있었다.게다가 벼는 작물 중에도 유난히 수확량이 많다. 뿌린 씨앗의 양과 수확해서 얻은 곡물의 양의 비교를 수확배율收穫倍率이라고 하는데, 15세기 데이터에 따르면 밀은 5배 밖에 되지 않았다. 한 알의 씨를 심으면 고작 5알밖에 안 되는 밀을 얻었다는 얘기다. 이에 비해 15세기의 벼의 수확배율은 20배였다.지금도 밀의 수확배율은 16배지만, 벼의 수확배율은 무려 130배에 달한다. 수확량이 많지 않은 유럽에서는 넓은 면적의 땅에서 농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 광활한 전원 풍경에는 그러한 이유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일본의 논은 손이 가면 갈수록 수확량이 많아진다. 일본인은 되는대로 면적을 넓히는 것 보다 손질을 해서 벼농사를 짓는 방법을 선택했다. 이 벼농사의 특징이 일본의 과밀함을 낳았고 일본인의 내향적인 국민성을 양성했다고 한다. 무사가 동쪽 지방에 구축한 100만 도시 에도그러나 단순히 인구 100만의 도시라고 해도, 간단하게 만들어질 리 만무하다. 우선 100만 명이 마실 수 있을 만큼의 물이 필요하다. 그리고 100만 명이 굶지 않도록 식량을 모아야 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사람이 살고 끼니를 먹으면 ‘나올 것’이 나온다. 이 100만 명분의 배설물을 처리하는 인프라 시설이 정비되어야 비로소 도시가 성립된다.19세기 런던에서는 도시를 흐르는 템스 강에서 심한 악취가 풍기고, 전염병이 만연했다. 하수도 정비가 인구증가를 따라가지 못했던 것이다. 세계를 선도하는 문명국가인 영국조차 인구증가에 따른 위생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런던보다 훨씬 인구가 많았던 에도에서는 왜 강이 오염되지 않고, 전염병이 만연하지 않았던 것일까.근대 농예 화학의 아버지이며, 식물의 성장에 필요한 3요소(질소, 인산, 칼륨)을 밝혀낸 19세기의 독일 화학자 유스투스 폰 리비히는 일본의 어떤 시스템에 주목하고 이를 절찬絶讚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의 분뇨를 농업에 이용하는 것이었다. 다이묘 저택의 인분뇨거름은 매우 비쌌다에도의 인구가 증가하자 근교에서는 논과 밭이 활발하게 개척됐고, 채소의 생산이 증가했다. 상대적으로 오래 보존할 수 있는 쌀은 멀리서 운반해 올 수 있지만, 쉽게 상하는 채소는 에도 근교에서 생산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농민들은 에도의 도시에서 사람의 똥오줌을 모아 인분뇨거름으로 만들었다. 농사를 지으려면 비료가 필요했기 때문이다.인분뇨거름은 ‘금비’金肥로 불리며, 농민들이 돈을 주고 사는 비료였다. 사람의 똥오줌은 결코 폐기물이 아니라 가치 있는 자원이었던 것이다. 인분뇨거름은 비료로 쓰이고, 재배된 채소는 사람들이 먹는다. 이 우수한 순환형 시스템에 의해, 에도는 인구 100만 도시를 가능하게 했다.인분뇨거름은 상품으로 유통되며, 전문적으로 인분뇨를 퍼내는 ‘거름 도매상’이란 업자가 있을 정도였다. 에도의 초닌町人[상인]들은 나가야長屋[에도시대의 단층 연립 주택]에 살고 있었는데, 나가야에는 공동 화장실이 있고 그 집에서 나오는 분뇨는 집주인의 것으로 정해져 있었다. 집주인은 이 인분뇨를 거름으로 팔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수익은 나가야의 집세보다도 많았다고 한다. 흔히 라쿠고落語[일본 전통 만담]에서는 나가야의 상인이 집세를 체납하는 얘기가 나오지만, 실제로는 집주인에게는 집세를 받는 것보다 그들이 공동 화장실을 써주는 것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인분뇨거름은 그 품질에 따라 가격이 매겨졌다. 신분이 다른 만큼 품질이 다르기 때문에 신분이 높은 집의 분뇨일수록 더 비싸게 거래됐다. 가장 가격이 비쌌던 것은, 다이묘 저택의 인분뇨거름이었다. 다이묘 저택의 인분뇨거름은 ‘킨판きんぱん’이라고 불리며 특별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인구 100만 도시의 인분뇨가 비료로 훌륭하게 이용되면서 에도 근교에서는 농업이 활성화됐다. 하천도 더러워지지 않고 아름답게 보존됐다. 어째서일까.농지에 처리된 많은 비료분은 강으로 흘러가 에도만으로 흘러들었다. 그런데 이 영양분은 하천을 더럽힐 정도의 많은 양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영양분을 먹이로 하는 플랑크톤이 발생하고, 그 플랑크톤을 먹으며 많은 물고기들이 자랐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풍부한 어장이 ‘에도마에江戶前’라고 불리는 바다였다.‘아깝다もったいない’라는 일본어가 있지만, 에도시대의 일본인은 모든 것을 버리지 않고 재활용하는 순환형 사회를 실현하고 있던 것이다.완전 재활용의 식물국가였던 일본에도시대가 되자 새로운 논이 개척되면서 쌀의 증산이 이뤄졌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쌀 생산이 늘면서 쌀의 가치가 하락하고 말았다. 쌀 본위의 경제에서는 쌀이 화폐와 같은 것이었으므로, 쌀의 가격이 내려가면서 번藩의 수입도 감소했다. 그래서 여럿 다이묘들은 환금성이 높은 상품 작물을 장려하는 경제정책을 실시했다.밀랍을 채취해 양초를 만들었던 옻나무과의 황로. (위키피디아)예를 들면 의류의 재료가 되는 섬유를 뽑기 위해 아욱과의 목화나 모시과의 삼麻을 재배하거나, 뽕나무를 재배해 누에를 사육, 비단을 생산하기도 했다. 게다가 의류를 염색하는 염료로서 여뀌과의 쪽이나 국화과의 잇꽃을 재배했다. 종이의 재료로 재배한 것은 뽕나무과의 닥나무나 팥꽃나무과의 삼지닥나무였다.에너지 자원은 어땠을까. 기름을 얻기 위한 식물로 유채과의 유채씨나 차조기과의 들깨를 재배했다. 옻나무과의 황로黄櫨에서는 밀랍을 채취해 양초를 만들었다. 이와 같이 에너지조차도 식물로부터 얻고 있었던 것이다.에도시대 일본은 무역을 제한한, 이른바 ‘쇄국 상태’에 있었다. 다시 말해 식량은 물론 국내에서 자급하고 있었다는 얘기다.현재 일본의 에너지 자급률은 고작 4%에 불과하다. ‘의식주’의 경우, 식량 자급률은 39%, 주택을 짓는 데 필요한 목재 자급률은 29%. 의류 자급률은 거의 0%이다. 에도시대의 일본은, 이 모든 것을 자급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 모든 것을 식물로부터 얻어 만들어내고 있었다. 다이묘들이 일구어 낸 나라는 다름 아닌 ‘식물국가’였던 것이다.오늘날 우리들은, 에너지는 물론이거니와 생활용품, 건설자재 등 생활에 관련된 온갖 것들을 한정된 화석연료를 가지고 만들어내고 있다. 몇 억 년 전이나 되는 옛날에 만들어진 석유 등 화석 연료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한편 에도시대에는 필요한 모든 것을 식물로부터 만들고 있었기 때문에 자원이 고갈되는 일 없이 영속적으로 재생산이 가능했다. 식물로 모든 것을 만들어 낸 에도시대의 사람들은 낡아빠진 것일까. 한정된 자원을 탕진하고 있는 현대인에 비교해 볼 때 과연 누가 에도시대의 사람들을 뒤떨어져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이나가키 히데히로  review@bookpot.net<저작권자 © 리뷰 아카이브,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에도의 막부 소재지.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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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의 막부 소재지. (위키피디아)쌀은 기특한 식물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도시계획을 기초로 만들어진 에도는 17세기 말~18세기 초 겐로쿠 문화기에 인구 100만 명의 세계 최대 도시로 발전했다. 당시 런던이나 파리는 40만 명의 도시였으므로, 에도는 월등히 거대한 도시였다. 지금도 도쿄를 중심으로 하는 수도권(1도都 6현縣)은 인구 3500만명이 넘는 세계 최대의 광역도시다.인구가 많다는 것은 과밀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 유럽과 비교했을 때 ‘과밀하다’는 일본의 이미지는 도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유럽을 여행하면 광활한 전원 풍경을 즐길 수 있지만 일본은 어디로 여행을 가더라도 협소한 가옥이 세워져 있는 등 오밀조밀한 느낌이 있다. 왜 일본은 오밀조밀한 것일까.유럽의 전원풍경을 보면, 광활한 밭이 한 쪽 면에 펼쳐져 있고, 마을은 아득하게 보일 뿐이다. 이를 잘 따져 보면, 마을의 생활을 영위하는 데 넓은 밭을 필요로 했다는 의미다. 반면 일본 에도시대의 마을을 보면 마을과 마을 사이의 거리가 가깝다. 일본에서는 적은 농지로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었던 것이다.16세기 전국시대의 일본은 똑같은 섬나라인 영국에 비해서 이미 6배나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만한 인구를 지탱했던 것은 ‘논’이라고 하는 시스템과 ‘벼’라고 하는 작물이었다.유럽에서는 감자나 콩류 등 여름작물을 재배하는 밭과 밀을 재배하는 밭, 작물을 재배하지 않고 쉬게 묵히는 휴한지 등 3개로 나눈 뒤, 돌아가면서 토지를 이용하였다. 즉, 밀은 3년에 1번밖에 재배할 수가 없었다. 이 농법은 삼포식三圃式 농법이라고 하는데, 3년에 한 번 밭을 쉬게 하지 않으면 지력地力을 유지할 수 없었다.이에 반해 일본의 논에서는 해마다 벼를 기를 수가 있다. 일반적으로 작물은 연작連作[같은 땅에 같은 작물을 해마다 심어 가꾸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매년 재배할 수 있는 벼는 실로 기특한 식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옛날에는 벼를 수확한 후에 밀을 재배하는 이모작을 행했다. 유럽에서는 3년에 한 번밖에 밀을 재배할 수 없었지만 일본에서는 1년 동안에 벼와 밀 양쪽을 수확할 수 있었다.게다가 벼는 작물 중에도 유난히 수확량이 많다. 뿌린 씨앗의 양과 수확해서 얻은 곡물의 양의 비교를 수확배율收穫倍率이라고 하는데, 15세기 데이터에 따르면 밀은 5배 밖에 되지 않았다. 한 알의 씨를 심으면 고작 5알밖에 안 되는 밀을 얻었다는 얘기다. 이에 비해 15세기의 벼의 수확배율은 20배였다.지금도 밀의 수확배율은 16배지만, 벼의 수확배율은 무려 130배에 달한다. 수확량이 많지 않은 유럽에서는 넓은 면적의 땅에서 농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 광활한 전원 풍경에는 그러한 이유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일본의 논은 손이 가면 갈수록 수확량이 많아진다. 일본인은 되는대로 면적을 넓히는 것 보다 손질을 해서 벼농사를 짓는 방법을 선택했다. 이 벼농사의 특징이 일본의 과밀함을 낳았고 일본인의 내향적인 국민성을 양성했다고 한다. 무사가 동쪽 지방에 구축한 100만 도시 에도그러나 단순히 인구 100만의 도시라고 해도, 간단하게 만들어질 리 만무하다. 우선 100만 명이 마실 수 있을 만큼의 물이 필요하다. 그리고 100만 명이 굶지 않도록 식량을 모아야 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사람이 살고 끼니를 먹으면 ‘나올 것’이 나온다. 이 100만 명분의 배설물을 처리하는 인프라 시설이 정비되어야 비로소 도시가 성립된다.19세기 런던에서는 도시를 흐르는 템스 강에서 심한 악취가 풍기고, 전염병이 만연했다. 하수도 정비가 인구증가를 따라가지 못했던 것이다. 세계를 선도하는 문명국가인 영국조차 인구증가에 따른 위생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런던보다 훨씬 인구가 많았던 에도에서는 왜 강이 오염되지 않고, 전염병이 만연하지 않았던 것일까.근대 농예 화학의 아버지이며, 식물의 성장에 필요한 3요소(질소, 인산, 칼륨)을 밝혀낸 19세기의 독일 화학자 유스투스 폰 리비히는 일본의 어떤 시스템에 주목하고 이를 절찬絶讚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의 분뇨를 농업에 이용하는 것이었다. 다이묘 저택의 인분뇨거름은 매우 비쌌다에도의 인구가 증가하자 근교에서는 논과 밭이 활발하게 개척됐고, 채소의 생산이 증가했다. 상대적으로 오래 보존할 수 있는 쌀은 멀리서 운반해 올 수 있지만, 쉽게 상하는 채소는 에도 근교에서 생산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농민들은 에도의 도시에서 사람의 똥오줌을 모아 인분뇨거름으로 만들었다. 농사를 지으려면 비료가 필요했기 때문이다.인분뇨거름은 ‘금비’金肥로 불리며, 농민들이 돈을 주고 사는 비료였다. 사람의 똥오줌은 결코 폐기물이 아니라 가치 있는 자원이었던 것이다. 인분뇨거름은 비료로 쓰이고, 재배된 채소는 사람들이 먹는다. 이 우수한 순환형 시스템에 의해, 에도는 인구 100만 도시를 가능하게 했다.인분뇨거름은 상품으로 유통되며, 전문적으로 인분뇨를 퍼내는 ‘거름 도매상’이란 업자가 있을 정도였다. 에도의 초닌町人[상인]들은 나가야長屋[에도시대의 단층 연립 주택]에 살고 있었는데, 나가야에는 공동 화장실이 있고 그 집에서 나오는 분뇨는 집주인의 것으로 정해져 있었다. 집주인은 이 인분뇨를 거름으로 팔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수익은 나가야의 집세보다도 많았다고 한다. 흔히 라쿠고落語[일본 전통 만담]에서는 나가야의 상인이 집세를 체납하는 얘기가 나오지만, 실제로는 집주인에게는 집세를 받는 것보다 그들이 공동 화장실을 써주는 것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인분뇨거름은 그 품질에 따라 가격이 매겨졌다. 신분이 다른 만큼 품질이 다르기 때문에 신분이 높은 집의 분뇨일수록 더 비싸게 거래됐다. 가장 가격이 비쌌던 것은, 다이묘 저택의 인분뇨거름이었다. 다이묘 저택의 인분뇨거름은 ‘킨판きんぱん’이라고 불리며 특별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인구 100만 도시의 인분뇨가 비료로 훌륭하게 이용되면서 에도 근교에서는 농업이 활성화됐다. 하천도 더러워지지 않고 아름답게 보존됐다. 어째서일까.농지에 처리된 많은 비료분은 강으로 흘러가 에도만으로 흘러들었다. 그런데 이 영양분은 하천을 더럽힐 정도의 많은 양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영양분을 먹이로 하는 플랑크톤이 발생하고, 그 플랑크톤을 먹으며 많은 물고기들이 자랐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풍부한 어장이 ‘에도마에江戶前’라고 불리는 바다였다.‘아깝다もったいない’라는 일본어가 있지만, 에도시대의 일본인은 모든 것을 버리지 않고 재활용하는 순환형 사회를 실현하고 있던 것이다.완전 재활용의 식물국가였던 일본에도시대가 되자 새로운 논이 개척되면서 쌀의 증산이 이뤄졌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쌀 생산이 늘면서 쌀의 가치가 하락하고 말았다. 쌀 본위의 경제에서는 쌀이 화폐와 같은 것이었으므로, 쌀의 가격이 내려가면서 번藩의 수입도 감소했다. 그래서 여럿 다이묘들은 환금성이 높은 상품 작물을 장려하는 경제정책을 실시했다.밀랍을 채취해 양초를 만들었던 옻나무과의 황로. (위키피디아)예를 들면 의류의 재료가 되는 섬유를 뽑기 위해 아욱과의 목화나 모시과의 삼麻을 재배하거나, 뽕나무를 재배해 누에를 사육, 비단을 생산하기도 했다. 게다가 의류를 염색하는 염료로서 여뀌과의 쪽이나 국화과의 잇꽃을 재배했다. 종이의 재료로 재배한 것은 뽕나무과의 닥나무나 팥꽃나무과의 삼지닥나무였다.에너지 자원은 어땠을까. 기름을 얻기 위한 식물로 유채과의 유채씨나 차조기과의 들깨를 재배했다. 옻나무과의 황로黄櫨에서는 밀랍을 채취해 양초를 만들었다. 이와 같이 에너지조차도 식물로부터 얻고 있었던 것이다.에도시대 일본은 무역을 제한한, 이른바 ‘쇄국 상태’에 있었다. 다시 말해 식량은 물론 국내에서 자급하고 있었다는 얘기다.현재 일본의 에너지 자급률은 고작 4%에 불과하다. ‘의식주’의 경우, 식량 자급률은 39%, 주택을 짓는 데 필요한 목재 자급률은 29%. 의류 자급률은 거의 0%이다. 에도시대의 일본은, 이 모든 것을 자급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 모든 것을 식물로부터 얻어 만들어내고 있었다. 다이묘들이 일구어 낸 나라는 다름 아닌 ‘식물국가’였던 것이다.오늘날 우리들은, 에너지는 물론이거니와 생활용품, 건설자재 등 생활에 관련된 온갖 것들을 한정된 화석연료를 가지고 만들어내고 있다. 몇 억 년 전이나 되는 옛날에 만들어진 석유 등 화석 연료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한편 에도시대에는 필요한 모든 것을 식물로부터 만들고 있었기 때문에 자원이 고갈되는 일 없이 영속적으로 재생산이 가능했다. 식물로 모든 것을 만들어 낸 에도시대의 사람들은 낡아빠진 것일까. 한정된 자원을 탕진하고 있는 현대인에 비교해 볼 때 과연 누가 에도시대의 사람들을 뒤떨어져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이나가키 히데히로  review@bookpot.net<저작권자 리뷰 아카이브,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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