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홈
소개

해상무역으로 세상을 바꾼 글로벌 비즈니스맨 ‘장보고’ 뛰어난 1인자보다 2등급 조직이 더 유용하다 - 매일경제

해상무역으로 세상을 바꾼 글로벌 비즈니스맨 ‘장보고’ 뛰어난 1인자보다 2등급 조직이 더 유용하다

입력 : 2017.07.06 09:32:37
장보고는 한마디로 글로벌 리더이다. 미천한 신분 출신으로 당나라로 건너가 군인으로 성장했고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으로 무역업에 뛰어들었다. 신라로 돌아온 뒤에는 청해진을 중심으로 한중일 해양을 장악한 해상무역세력으로 성장시켰다. 그의 힘은 왕의 자리마저 좌지우지 했지만 그러나 그의 최후는 허무했다. 암살자에게 살해당한 장보고는 리더가 갖추어야 할 덕목 중 유일하게 자신의 조직을 체계화, 제도화 하지 못한 실수를 범했던 것이다.
글로벌 마인드 갖춘 1200년 전 영웅
우리의 역사 속 인물 중에서 능력과 업적에 비해 평가가 과장된 인물이 있는가 하면 저평가된 인물 역시 많다. 그중에서 장보고는 가장 저평가된 대표인물이다. 장보고라는 이름 석 자에서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청해진, 해상왕, 신라시대, 드라마 <해신>, 최수종… 뭐 이런 단편적인 단어들이다. 하지만 장보고는 약 1200년 전 당시의 제도와 상식 그리고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타파한 혁명적인 인물이다. 게다가 그는 신라라는 작은 땅에 머물지 않고 신라, 일본, 당나라는 물론 멀리 서역까지 연결하는 무역 루트를 개척한, 그야말로 글로벌한 인물이었다.
철저한 계급 사회인 신라에서 미천한 신분 출신인 그는 신라에서는 자신의 능력을 펼칠 수 있는 기회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좌절하거나, 반항하지 않고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했다. 그는 당나라로 갔다. 당시 당나라는 가장 개방적인 국가였다. 수도 장안은 물론이고 각 절도사가 지배하는 영지마다 온갖 인종과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덕분에 사람, 돈, 문화가 넘쳐났고, 실력만 있다면 얼마든지 출세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장보고는 그곳에서 군대에 입대했다. 타고난 재주와 탁월한 무예로 절도사의 눈에 들은 그는 출세를 거듭해 무령군중소장이 되었다. 이 직분은 군대에서 약 3000명의 병력을 지휘할 수 있는, 지금으로 치면 영관급 장교이다.
장보고는 그곳에서 세상을 보았다. 신분을 뛰어넘기 위해 군인이 되었지만 한계를 본 것이다. 그는 군대를 제대하고 무역업에 뛰어들었다. 당시 당나라에는 신라계 유민들이 많이 있었다. 장보고는 이들을 조직화 했다. 그는 당나라에서 신라, 일본, 당나라, 남방, 서역 등을 잇는 일종의 중계 무역을 생각해냈고 이를 행동에 옮겼다. 그의 글로벌 전략이 돋보이는 순간이었다. 장보고는 자본을 축적했다. 하지만 뜻을 펼치기도 전에 그의 눈에 들어온 장면들은 수많은 신라 사람들이 해적이나 상단에 의해 포획되어 노예로 팔리는 처참함 뿐이었다. 울분을 참지 못한 그는 신라로 돌아와 흥덕왕에게 이 같은 현실을 소상히 알렸다. 그리고 자신에게 군사를 주면 더 이상 신라인이 노예로 팔려가는 비극을 막는 동시에 신라 남쪽을 위협하는 해적들을 소탕하겠다고 건의했다.
흥덕왕은 장보고에게 1만명의 군사를 주었다. 장보고는 지금의 완도에 청해진을 세우고 ‘청해진 대사’가 되었다. 그는 남해, 황해, 남중국해를 넘나들며 해적을 소탕하면서 바다를 장악했다. 장보고의 혜안이 돋보이는 것은 이런 단순한 군사적 성과만이 아니다. 당시에 각 국가 간의 무역은 관이 주도하는 일종의 조공무역이었다. 즉 당나라를 중심으로 각 국가의 물적 교류는 ‘조공’이라는 형태로 유지되었다. 장보고는 이를 확대시킨 장본인이다. 그는 조공무역의 한계를 벗어난 민간 자본에 의한 무역을 시도했고 이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가 거느린 청해진의 병력은 군대이면서 무역회사 직원이었다.
이 같은 장보고의 성장은 신라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가 갖고 있는 군사력, 자본력, 정보력은 신라의 그 어떤 귀족도, 심지어 왕의 권력을 능가할 정도였다. 당시 신라는 귀족간의 치열한 권력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신라 귀족은 장보고를 그 세력 싸움의 한가운데로 이끌었다. 장보고는 강력한 무력을 바탕으로 신라 왕위 계승에 관여했다. 성공했다. 하지만 이것이 장보고를 패망으로 이끄는 길이 되었다.
장보고의 권력은 유한했다. 신라 귀족들은 미천한 신분의 장보고를 권력의 정점에서 끌어내리는 목적에 있어서는 한마음이었다. 그들은 암살자를 고용했다. 한때 장보고의 부하였던 염장이었다. 장보고는 그를 흔쾌히 받아들였고 술이 넘치는 잔치가 벌어졌다. 그날 밤, 염장은 장보고의 심장에 단도를 꽂았다. 이렇게 장보고가 죽자 청해진은 혼란에 빠지고 곧 와해되었다. 우리 역사상 가장 진취적이고 사업적 마인드가 탁월했던 영웅의 말로는 비참하고 허무했다. 그의 리더십을 바탕으로 형성됐던 청해진은 그의 부재와 함께 무너졌다. 어쩌면 청해진과 거대한 해상세력이 조직화, 체계화 되지 못하고 장보고 1인의 역량으로 유지된 것은 비극이었다. 그럼에도 우리가 장보고에게 배울 점은 머물지 않고 도전하는 정신, 시대를 앞서는 안목, 그리고 신분과 출신, 인종을 따지지 않고 능력을 기준으로 인재를 발탁하는 글로벌 마인드다.
당나라에서 전략과 지휘력을 배우다
장보고는 서기 787년 신라 남쪽에서 태어났다. 신라 귀족들이 그를 ‘해도인 海島인’이라 지칭한 것으로 보아 남해의 섬 출신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는 ‘장보고 집안이 농사를 지으며 어부 노릇도 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유사>에는 ‘미천한 평민 출신’이라는 것으로 보아 가난하고 이름 없는 가문 출신으로 보인다. 더구나 애초의 이름이 궁복, 궁파로 성이 없었다. 대신 이름 그대로 활을 잘 쏘고, 수영도 잘 했으며 창술 등 무술 솜씨가 뛰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 씨인 ‘장 張’ 씨 역시 장보고가 중국에서 활동했던 시기에 가져온 것으로 추정된다. 어린 시절을 섬에서 보낸 장보고는 당나라로 떠날 결심을 한다. 철저한 골품제 신분 사회인 신라에서는 아무리 뛰어난 재능과 출중한 무예 솜씨를 갖고 있어도 관직에 오르거나 요직에 발탁될 가능성이 없었다.
이때 장보고는 평생을 같이 하는 동지이자 후배를 만나게 된다. 바로 정년이다. <삼국사기>에는 ‘장보고와 정년, 그들의 고향이나 집안은 정확히 알 수 없다. 두 사람이 모두 무술 솜씨가 뛰어났다. 또한 정년은 바다 밑으로 들어가 50여 리를 가면서도 전혀 지치지 않았다. 그 용맹함을 비교하면 장보고가 정년에게는 좀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정년은 장보고를 형으로 모셨다. 장보고는 나이로 정년을 눌렀지만 무술은 항상 맞서 서로 지지 않았다. 두 사람은 모두 당나라로 건너가 무령군소장이 되었다. 두 사람은 말을 타고 창을 쓰는데 감히 대적할 자가 없었다’고 두 사람을 설명했다.
정년은 장보고와는 오랜 친구이자 동생이었다. 장보고가 정년보다 10살 위였다. 두 사람은 같이 당나라 서주로 건너가 군대에 입대해 곧 두각을 나타냈다. 같이 소장으로 진급해 활동했고, 그 후 장보고는 군대에서 나와 무역상단을 이끌었지만 정년은 군대에 계속 남아 있었다. 이때부터 두 사람 사이에 왕래도 끊어지고 서먹한 관계가 되었다. 훗날 장보고가 신라로 와 청해진을 열고 크게 출세했는데 정년 역시 신라에 있었지만 어려운 처지였다. 정년이 장보고를 찾아오자 장보고가 그를 따뜻하게 맞아주고 자신을 권력을 나눠주었다고 한다. 장보고의 넓은 마음이 드러나는 일화이다.
장보고가 당나라에서 군대를 나온 것은 혼란의 시기, 즉 절도사의 난이 정리되자 더 이상 군대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하지만 장보고는 이른바 ‘절도사의 전성시대’에 군대에 있으면서 지방 군벌의 생존 방법이나 군대를 양성하고 지휘하는 방법을 배웠다. 청해진을 만든 토대를 마련한 셈이다. 상단을 이끌며 무역업을 하던 장보고는 신라인의 집단 거주지인 산동성 문등현 적산촌에 법화원을 설립하고 대폭적인 지원을 했다. 그리고 노예로 팔려나가는 신라인들을 거두고 이들을 자유민으로 만들거나 농지를 주어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해주었다. 그러면서 당시 당나라 산동성 등주 일대를 중심으로 신라인 거점을 마련했다. 그곳의 정신적, 물질적 후원자 역할을 장보고가 한 것이다. 장보고는 신라인들이 해적에게 납치되어 노예로 팔려나가는 것을 목도하고 울분을 참지 못했다. 신라 조정은 이 같은 비참한 현실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권력 투쟁에만 집중했다. 장보고는 해적을 소탕하기로 마음먹었다.
청해진, 당나라, 일본을 잇는 네트워크
828년 장보고는 신라로 돌아왔다. 그리고 흥덕왕을 만나 신라인이 해적에게 납치되어 당나라에서 노예로 팔려가는 현실을 보고하고 청해진 설립의 목적을 설명했다. 흥덕왕은 장보고의 제안을 받아들여 장보고에게 1만 명의 군사를 내주었다. 장보고는 완도에 대규모 해상 군사기지를 건설했다. 성책을 쌓고 배의 접안 시설을 마련하고 군사와 백성들이 머무는 숙소도 건설했다. 이때 장보고의 직책은 ‘청해진 대사大使’였다. 이는 당시 신라의 정규 관직이 아니었다. 철저한 신분사회인 신라 안에서 장보고에게 일정의 권한을 주기 위해 흥덕왕이 만든 직함으로 해석된다. 즉 지금의 별정직 공무원 같은 개념이다.
장보고는 청해진을 적극 활용했다. 당나라 군대에서 익힌 전략을 바탕으로 장보고의 해군은 서남해 해상권을 장악했다. 해적들은 장보고의 선단에 격퇴 당했으며 신라인이 해적에 납치되어 노예로 팔려가는 일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몇 년간 장보고와 해군의 활약으로 해적들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장보고는 청해진 해군의 다른 용도를 찾았다. 그것은 대규모 무역 선단 운영이었다. 당시 당나라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국제 교역은 조공 무역이었다. 즉 국가 관리 무역으로 해당 물품의 종류나 양이 많이 부족했다. 장보고는 틈새 시장을 파고들었다. 당나라, 일본, 신라, 남방 국가는 물론 멀리 서역까지 왕래하는 대규모 선단, 즉 ‘청해진 무역회사’를 운영한 것이다.
그는 일본에는 회역사, 당나라에는 매물사라는 무역대표를 보냈다. 하지만 일본 등 몇몇 국가에서는 장보고의 무역 독점을 인정치 않고 여전히 국가 주도의 관리 무역만 인정했다. 장보고는 이에 굴하지 않고 조정은 물론 민간 무역의 루트를 개발했다. 그러면서 국가의 공식 외교관 역할도 수행했다. 이렇게 십수 년간, 장보고는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이 자본을 바탕으로 장보고의 권력은 커져갔다. 더구나 장보고는 당나라에 자리 잡은 법화원에도 지속적인 지원을 해 그곳을 신라인은 물론 일본과 당나라 승려들의 연수원으로 만들었다.
이곳에서 10여 년간을 머물며 공부를 한 일본의 승려 엔닌이 훗날 일본 천태종을 중흥시켰다. 지금도 교토의 히에이 산 적산선원에는 적산대명신이라는 신라인들이 모시던 신을 상징하는 상이 남아있는데 이것이 바로 장보고에 대해 무한한 감사의 마음을 간직한 엔닌의 뜻이라고 한다. 이 같은 장보고의 광범한 활동으로 ‘827년부터 835년까지 신라인의 노예 매매가 사라졌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장보고는 청해진 안에서만은 능력평가의 인사제도를 만들었다. 그는 신분, 계급을 따지지 않았다. 오로지 실력만으로 인재를 평가해 등용했다. 9세기 무렵에 한반도 땅에 일종의 자유경쟁지역, 계급사회의 해방구가 존재한 것이다. 그러면서 장보고의 청해진은 점차 신라 조정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했다. 무력으로는 해적을 소탕했고, 선단을 운영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장보고의 힘은 당시 신라의 그 어떤 귀족과 가문을 능가했다. 그러면서 장보고에 대한 신라 중앙귀족들의 질시와 모략이 시작되었다.
독자적인 세력에서 신라의 중앙정치로
장보고의 후원자인 흥덕왕이 후계를 정해놓지 못하고 죽자 신라 왕실은 치열한 왕권 다툼이 벌어졌다. 왕위 승계 1위는 흥덕왕의 사촌동생 김균정이었다. 하지만 흥덕왕의 또 다른 사촌동생 김헌정과 그의 아들 김제륭이 군사를 일으켰다. 신라 왕실과 조정은 두 쪽으로 분열되었다.
김균정의 세력은 아들 김우징과 김양이었다. 김제륭은 김명이 후원했다. 군사를 동원한 권력투쟁 결과 김제륭이 김균정을 이기고 왕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희강왕이다. 이때가 835년이다. 아버지를 잃고 전투에서 패한 김우징은 간신히 목숨만 부지한 채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그는 청해진의 장보고에게 갔다. 장보고는 김우징을 받아들였다. 장보고의 넓은 배포와 아량이 김우징을 받아들이기도 했지만, 그가 장보고를 찾아갔다는 것은 김제륭도 청해진을 감히 공격할 수 없다는, 즉 청해진은 왕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무력집단임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 사건이 장보고의 독자적인 해상세력, 무역세력, 민간세력에서 신라의 중앙정치에 발을 내딛는 발단이 되었다.
838년, 경주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희강왕 김제륭을 후원했던 김명이 군대를 동원해 궁으로 쳐들어간 것이다. 희강왕은 자살했다. 김명이 왕위에 올랐다. 그가 민애왕이다. 이처럼 신라 왕실이 혼란에 빠지자 장보고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던 김우징이 김양과 함께 쿠데타를 모의했다. 이들에게는 장보고의 강력한 군대가 필요했다. 장보고는 “내가 흥덕왕을 만날 때 김 공이 큰 도움이 되었소. 이제 그 의리에 보답하고자 하오. 또한 의로운 일에 나서지 않으면 어찌 도리를 안다고 할 것이요. 내 군사를 내어줄 것이오”라고 답했다.
장보고는 곧바로 정년에게 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경주로 진군하라 명령했다. 정년이 이끄는 장보고의 정예병 앞에 신라군은 상대가 되지 못했다. 순식간에 경주로 들어간 정년의 부대는 민애왕을 죽였다. 그리고 김우징이 왕위에 올랐다. 이가 바로 신무왕이다. 이 사건은 단순하게 왕실간의 다툼이 아니었다. 골품제 사회의 신라에서 평민 출신의 장보고가 일종의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장보고는 신무왕 정권의 최고 실력자가 되었다. 그가 청해진을 중심으로 군벌의 위치에서 중앙 정치무대에서 자타공인 최고 실권자임을 공인받은 것이다. 신무왕은 장보고를 절대 신임했다. 장보고에게 감의군사 직을 내리고 식읍 2000호를 하사했다. 장보고는 신라의 육군과 해군을 장악했다. 장보고는 경주에서 국정을 펼쳤고 청해진은 장보고의 심복 정년이 경영했다.
하지만 장보고는 운이 없었다. 신무왕이 왕위에 오른 지 불과 1년 만에 등창이 나 죽고 만 것이다. 그 뒤를 신무왕의 아들 김경웅이 이었다. 이가 바로 문성왕이다. 문성왕도 장보고를 신임했다. 아니 무시할 수가 없었다. 문성왕은 장보고를 진해장군으로 임명하고 일본, 당나라를 잇는 삼각 무역을 승인했다. 이 진해장군 직책은 원래 신라의 귀족 중에서도 으뜸인 진골만이 임명되는 직이었다. 이로서 장보고는 무력, 자본을 장악하고 그의 가장 아킬레스건인 신분마저 상승한 것이다. 그야말로 장보고의 전성시대였다. 하지만 경주의 궁궐 깊숙한 곳에서는 음모가 싹트고 있었다. 신라의 전통적인 권력집단인 성골, 진골을 중심으로 한 귀족들이 장보고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장보고는 노련한 귀족집단을 강력한 무력으로 제압했다. 장보고의 칼과 창 아래 귀족들은 고개를 숙였다.
신분의 콤플렉스, 꿈을 무산시키다
845년, 사건이 벌어졌다. 문성왕이 장보고의 딸을 둘째 왕비로 맞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사실 이 같은 정략적인 결혼은 신무왕 때 약속이 되어 있었다. 신무왕은 장보고의 군사를 빌리며 “내가 왕이 되면 대사의 딸을 내 왕비로 맞아들이겠다”고 약속했었다. 하지만 신무왕이 갑자기 죽으면서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자 그의 아들인 문성왕이 이를 실행에 옮기려 한 것이다. 하지만 귀족 집단은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렇지 않아도 장보고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있는데 이제 그가 왕실과 사돈관계를 맺으면 그 세력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부부의 도는 인간의 길 중에서 가장 큰 윤리입니다. 역사를 보면 왕비를 잘못 들여 나라가 망한 예가 수없이 많습니다. 주나라는 포사로 인해 망했고 진나라 역시 여희로 인해 멸망을 길을 걸었습니다. 어찌 궁복이 공이 있다 해도 그는 ‘해도 海島’ 사람인데 그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한마디로 신분이 미천해 왕실과 사돈이 될 수 없다는 귀족들의 주장이었다. 문성왕도 이를 받아들였다. 장보고의 분노가 폭발했다. 문성왕이나 그의 아버지인 신무왕도 자신이 아니었으면 왕이 될 수 있었겠는가,라는 생각과 아직도 자신의 신분을 문제 삼는 것에 장보고는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물론 문성왕이나 귀족들은 장보고의 세력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는 것에 불안을 느껴 왕비 간택을 반대했다. 장보고와 왕실의 불안한 동거가 계속되었다. 문성왕과 귀족들은 장보고가 당장이라도 병사들을 이끌고 궁으로 쳐들어올까 전전긍긍했다. 하지만 달리 방법도 없었다. 장보고의 군사력이 워낙 막강해 먼저 공격할 수도 없었다. 장보고는 반기를 들었다. 군사력과 축적된 부로 중앙정부와 별개의 자신만의 세력을, 세상을 꿈꾼 것이다. 장보고는 당나라에서 각 절도사들이 강력한 황제에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경험했다. 그때의 배움을 토대로 장보고는 군벌로서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장보고는 존재만으로도 신라에 위협이 되었다. 문성왕과 귀족들은 머리를 맞대고 토의를 했지만 장보고를 제거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이때 염장이 나섰다. 그는 장보고를 찾아가 귀순했다. 물론 거짓이었다. 호방한 성격의 장보고는 염장을 맞아들였다. 그날 밤, 잔치를 베풀고 거나하게 술을 마셨다. 취한 장보고가 잠이 들자 염장이 장보고의 칼을 빼어 그를 살해했다. 846년, 일세를 풍미한 해상 영웅의 허무한 최후였다. 장보고가 죽은 뒤 그의 아들과 부하 이창진에 의해 청해진은 유지되었으나 그 세는 점점 약해졌다. 851년 문성왕은 청해진을 해체하고 그곳의 백성들은 모두 벽골군으로 이주시켰다. 장보고의 흔적을 지운 것이다.
장보고의 죽음은 한 개인의 죽음이 아니었다. 신라의 전통적인 귀족 세력과 평민 출신의 해양무역 세력 간의 대결에서 결국 해양 세력이 패한 것이다. 이로서 9세기 무렵 한반도와 중국, 일본을 연결하는 삼각무역으로 거대한 상권을 형성했던 개척자가 사라지면서 이후 한반도의 그 어떤 왕조와 세력도 해양을 지배하지 못했다.
결국 장보고 역시 철저한 계급 사회와 기득권층의 두꺼운 벽을 끝내 넘어서지 못한 것이다. 신분에 의한 차별이 없는 사회, 능력으로 출세할 수 있는 사회, 무역으로 부를 축적하고 이를 바탕으로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려 했던 장보고에 대한 평가는 오히려 당대 일본과 당나라에서 이루어졌다. 당나라의 시인이며 학자인 두목은 그의 책 <번천문집>에서 “나라에 똑똑한 사람 한 사람만 있으면 그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 그 한 사람이 바로 장보고이다”라고 극찬했다. 일본의 법승 엔닌 역시 당나라 유학 시절을 기록한 <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 장보고의 인품과 능력에 대해 존경과 흠모의 마음을 담았다.
▷#리더십 | 뛰어난 1인보다 2등급 조직이 더 유용하다
우리 역사에서 장보고처럼 무에서 유를 만들어낸 사례를 찾기 힘들다. 평범한 신분에서 당나라로 건너가 군인으로 성장했고 이후 시대를 앞서는 혜안으로 무역업에 뛰어들어 일가를 이루었다. 그리고 신라로 돌아와 강력한 해상세력인 청해진을 구축하고 왕도 자신의 손으로 세울 만큼 권력을 장악했다. 더구나 장보고의 시선은 신라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청해진을 중심으로 당나라 산동의 법화원, 일본 천태종의 법승 엔닌을 아우르는 이른바 글로벌 네트워크를 만들어냈다. 원대한 리더십의 전형이 바로 장보고이다. 그는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으로 출세와 평안한 삶이 보장된 군인에서 험난하고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무역상이 되었다. 그리고 이 성공을 담보로 청해진을 중심으로 한중일 삼각무역은 물론 거대한 선단을 운영해 당대 최고의 해상왕 겸 무역왕이 되었다. 또한 그는 편견을 갖지 않은 리더였다. 신분, 인종, 출신을 따지지 않고 오직 능력과 재주로 인재를 발굴했고 반대파도, 심지어 적마저도 감싸는 포용 리더십의 주인공이었다.
하지만 장보고에게도 약점은 있었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미래를 담보하기 위해 기득권 세력과 손을 잡으려 했다. 그 순간부터 장보고는 또 하나의 기득권 세력이 된 것이다. 장보고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그가 원 톱 주연이라는 것이다. 그의 부하, 아들 등 그 누구도 장보고의 빈자리를 대신하지 못했다. 이는 개인적인 능력을 떠나 리더가 가져야 할 조건인 조직의 안정화에 이루지 못한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장보고 사후, 그토록 거대하고 단단한 성처럼 보였던 청해진은 너무나도 쉽게 무너졌다. 이는 장보고가 만들어낸 ‘청해진 무역회사’가 조직적으로, 제도적으로 경영되지 않고 1인의 카리스마와 능력에 의존했다는 증거이다.
기득권의 장단점 파악이 먼저다
K부장은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이다. 지방대를 나온 그는 중소 건설회사 G에 입사했다. 이 회사는 대기업인 S기업의 제1하청을 주로 맡는 회사이다. 성실함과 뛰어난 능력으로 S기업의 담당 이사의 눈에 들은 그는 S기업으로 스카우트 되었다. 예외적인 발탁 인사로 모든 이의 주목을 받았다. K부장은 그야말로 헌신적으로 일을 했다. 하청 기업의 비밀, 즉 원가 계산부터 현장의 상황까지 모두 알고 있는 그는 하청업체를 담당하며 비용 절감과 수익 확대에 공헌했다. 하지만 S기업 내부에서 K부장에 대한 불만이 나오기 시작했다. ‘너무 독선적이다’, ‘안하무인으로 하청업체를 다룬다’ 등등 주로 업무 분야보다 인성에 관한 비난이 일었다.
K부장은 서서히 왕따를 당하기 시작했고 S기업 출신들의 공공의 적이 되었다. 주요업무에서 배제되기 시작한 그는 결국 오래 버티지 못하고 작은 중소 건설회사로 옮기고 말았다. 그가 퇴직할 시기에 회사 안에서는 ‘결국 공채 출신이 아닌 K부장이 밀려난 것이다’, ‘하청업체 출신이 와서 오래 버틴 것이지’ 등의 말이 돌았다. 그러나 K부장의 실패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는 원청과 하청업체 간의 ‘비밀 카르텔’을 건드린 것이다. 100에 수주 받은 원청은 이를 70에 하청에 넘기고 하청업체는 이를 50에 제2하청에 넘기는 것이 건설사의 관행이다. 이 과정에서 리베이트, 비자금 등 덩치 큰 금액부터 현장직원들의 소소한 용돈까지 오고가는 것이 그동안의 관행이었다. 이를 모두 알고 있는 K부장의 과감하고 원칙적인 하청업체 다루기에 S기업 고위 임원들의 불만이 터져 나온 것이다. 그들은 회사의 실질 수익 증대도 중요하지만 끼리끼리 먹고사는 카르텔 형성이나, 이로 인한 네트워크 관리, 회사의 비자금 수급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K부장의 실패는 사실 기득권 카르텔의 벽에 부딪친 것이다. 만약 그가 S기업 공채 출신에 고위 경영진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면 그가 시도한 원칙과 정직한 부서 운영이 실패로 돌아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부정에 동참하고, 눈을 감으라는 것은 아니다.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
이 말에 갖는 의미는 처세도 리더십도 변화하고 진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밥을 지을 때도 쾌속 기능이 있다. 편리한 방법이지만 직장이나 사회에서 쾌속은 항상 쉰밥을 만드는 원인 중 하나이다. 지루할 수 있지만 시간과 세월이 가져다주는 채움과 비움의 법칙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다.
[글 박기종(커리어코칭 칼럼니스트) 사진 픽사베이, 위키미디어]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586호 (17.07.11일자)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늘의 핫뉴스

AD

당신이 좋아할 만한 기사

돌아가기
돌아가기
돌아가기
돌아가기
돌아가기

댓글

collect.php
d41d8cd98f00b204e9800998ecf8427e
계정으로 댓글 작성
. .
.
Jihun Jang
.
0/250
. . .

시선집중

전체 메뉴

매일경제
매경닷컴
서울특별시 중구 퇴계로 190
02) 2000-2114
인터넷신문등록번호 : 서울 아01043
등록일자 : 2009.11.30
발행일 : 2009.11.30
발행인/편집인 : 진성기
Copyright (c) 매경닷컴. All rights reserved. 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