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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기 신석기시대 유물 다양하게 발견 바다와 산이 있는 강진은 천혜의 땅  지난 2008년 강진읍 ~ 도암 계라리간 4차선 도로 공사 현장에서 발굴된 양유동유적 현장이다. 이곳에서는 삼국시대 주거지 14기가 확인됐다. 주거지에서는 부뚜막과 취사장, 콩, 쌀, 보리등도 발견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사진= '강진'. 국립광주박물관 발행> 1. 구해국이라는 나라가 강진은 내륙과 해양을 잇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한반도에서 제주도와 일본 및 중국을 오갈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강진은 산과 강과 바다와 섬을 모두 끼고 있다. 물산이 다양한데다 온화한 날씨에 들도 넓어 풍요로움마저 깃들어 있다. 그래서 강진 땅에는 일찍부터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 구석기, 신석기 시대의 유물이 강진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칠량면 흥학리 중흥마을에서 구석기 시대의 도구인 긁개가 발견되었다. 강 주변에서 구석기 사람들이 살았던 점을 감안하면, 탐진강 유역에서 유물이 더 나올 가능성은 높다.   신석기 시대의 유적이 강진 아래의 완도 여서도와 강진 위의 탐진강 상류 장흥 땅에서 발견되었다. 구석기, 신석기 시대 사람들이 강진 땅에서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청동기시대에 이어 철기 시대로 접어들면 강진 땅에도 마침내 국가가 등장하게 되었다. 철제의 농기구와 무기 사용으로 농업 생산력이 증가하고 정복전쟁이 치열해졌기 때문이다. 구해국(狗奚國)이라는 소국이 그것인데, 삼한 시대의 마한(馬韓) 연맹체에 속했던 54국 중의 하나이다. 구해국 자리는 나중에 구계소(舊溪所, 조선시대 읍치의 남쪽 37리)가 있었던 강진만 부근 바닷가라고 한다. 자연히 당시 강진 사람들은 바다를 토대로 하여 생활하여 해상활동을 활발히 펼쳤다. 그 결과 구해국 존재는 바다 건너 일본에까지 알려져 있었는데, 구해국이『일본서기』에는 고해진(古奚津)이라고 적혀 있다. 나라의 등장과 함께 대형 옹관묘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탐진강 하구인 군동면 일대에서 봉분을 갖춘 옹관묘가 10~20기씩 발견되었는데, 그 속에서 다량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야산을 밭으로 개간하면서 일부 옹관묘는 파괴되어 주위에 옹관과 토기의 파편이 산재해 있으니, 이 보다 더 많은 옹관묘가 있었다. 이는 유력 세력가들이 강진 지역에 포진되어 있었던 증거인 것이다(『강진군지』).2. 백제에 의해 도무군과 동음현으로 구해국은 팽창하는 백제에 정복되었다. 한강 유역에 자리를 잡은 백제는 4세기 후반 근초고왕 때에 세력 확장을 위해 대대적인 남방 공략에 나섰다. 그때 강진 지역도 왕과 왕자의 강력한 공격을 직접 받고 마한 여러 나라 가운데 가장 먼저 백제에 복속되고 말았다. 강진이 바다를 연결하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백제는 영산강 유역의 마한세력이 가야나 탐라와 연결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가장 먼저 강진 지역을 점령했다. 백제가 일찍부터 강진 지역의 군사⋅경제적 비중을 자세히 알고 있어 취했던 조치였음에 분명하다. 백제는 6세기에 지방제도를 개편하면서 강진 땅에 도무군(道武郡)과 동음현(冬音縣)이라는 두 고을을 두었다. 이 두 개의 고을이 신라와 고려를 거쳐 1천년 동안 유지되었으니, 백제의 행정구역 개편은 강진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조치이다. 그리고 백제는 강진 땅에 불교 사찰을 건립하여 오랜 동안 유지되어 온 마한의 전통문화를 해체시켰다. 성전면 월남사지와 무위사에서 백제 기와가 다량 출토된 것으로 보아, 그 가능성은 높다. 또한 백제는 국가의 무사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월출산에서 국가 제사를 지냈다. 지리적 중요성이 높은 강진에 대한 백제의 관심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도무군은 산을 끼고 있는 북쪽 평야지대에 있었다. 오늘날의 성전면, 작천면, 병영면 일대가 그 영역이었다. 도무군 치소는 조선시대 치소(현재의 강진 군청 자리)를 기준으로 북쪽 20리에 있었다. 그 위치는 현재의 성전면 수양리로 추정하는데, 그곳에서 백제 계통의 석실분이 확인되었고 그 안에서 수준 높은 각종 토기가 출토되었다. 도무군은 바다를 끼고 있는 오늘날 해남의 마산⋅현산⋅문내면까지 관할하는 큰 고을이었다. 그런 점 때문에 도무군의 치소가 해남군 북일면 일대에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확인하기 어렵다. 반면에 동음현은 바다를 끼고 있는 남쪽 평야지대에 있었다. 오늘날의 강진읍, 군동면, 칠량면, 대구면 일대가 그 영역이었다. 동음현 치소는 현재의 강진 군청 뒤편 산자락인데, 그곳에서 백제 때의 토기와 기와 등이 출토되었다. 바로 이곳이 강진의 중심지로 조선을 거쳐 오늘에까지 이른다. 이렇게 백제 때에 강진 지역에 두 개의 고을이 들어선 것은 산간지대와 해안지대로 나누어진 강진의 지형적 특성을 고려한 강진 사람들의 삶을 반영한 결과였다. 이때 완도, 청산도, 고금도 등의 섬도 강진 지역에서 관할했다. 이들 섬에서 백제 시대의 고분이 조사되었는데, 강진을 통한 지배의 결과였다. 이들 섬은 일본이나 제주도 교역의 요충지이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강진을 통한 지배 시스템이 가장 합리적이었을 것으로 판단하였을 것이다.3. 신라에 의해 양무군과 탐진현으로 신라는 통일 이후 대대적으로 지방 행정구역을 개편했다. 먼저, 전국을 9주 5소경으로 나누었다. 9주 가운데 광주에 치소를 둔 무진주가 오늘날 전남 지방을 다스렸는데, 그 아래에 14개의 군과 44개의 현이 있었다. 그리고 신라는 고을 이름을 한자식으로 바꾸었다. 그에 따라 도무군을 양무군(陽武郡)으로, 동음현을 탐진현(耽津縣)으로 고쳐서 무진주에 소속시켰다. 그때가 757년이었다. 여기서 눈여겨 볼만한 것은 동음현을 탐진현으로 개칭한 것이다. 그렇게 한 때는 바로 “고을나의 15대손 고후와 고청 등 형제 3인이 바다를 건너 탐진에 이르니 때는 신라의 성시였다”고 하여 통일 신라 때였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읍호를 탐라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올 때 처음으로 탐진에 상륙하였기 때문이다”고 하였다(『고려사』). 탐진이라는 포구에 도착했기 때문에 고을 이름을 탐진현으로 바꾼 것이다. 고후 등이 도착한 탐진은 “탐라 임금의 아들이 신라에 조공할 때에 배를 여기(구십포)에 머물렀으므로 이름을 탐진이라 한다.”(『신증동국여지승람』)하여 구십포(현재 강진읍 목리)였다. 이렇게 보면, 고후 등이 도착한 포구는 ‘탐라로 가는 나루’여서 ‘탐진’으로 명명되었다. 그리고 탐진 포구가 있는 고을 이름도 아예 탐진으로 바뀌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강진과 제주도의 교역이 매우 빈번했을 뿐만 아니라, 매우 중요했음을 의미한다. 바다를 향한 강진의 중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지게 되었다(문안식, 「고대 강진과 그 주변지역 토착세력의 활동과 추이」). 828년에 완도에 청해진이 설치됨으로써 강진의 중요성은 더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완도는 이전부터 강진 관할이어서 강진은 청해진의 배후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청해진이 정치적 주목을 받고 경제적 호황을 누리자, 강진 일대는 수많은 병력과 정치적인 야심을 가진 인사들의 집결처였을 뿐만 아니라, 청해진에 대한 물산의 공급처와 교역처였다. 강진군 관내에 본관을 둔 도강 김씨는 청해진에 와서 장보고의 지원으로 신무왕이 된 김우징의 아들 김희조를 시조로 한다고 한다. 강진 청자의 생산 시기가 청해진의 폐쇄 시기와 연결되어 있어 청자 무역을 주도하던 청해진이 폐쇄되자 강진 사람들이 직접 생산에 들어갔음을 의미한다. 청해진과 장보고의 몰락 이후 신라는 급격한 혼란에 빠진다. 왕위 쟁탈전이 끊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처에서 민중 봉기가 일어났다. 민생이 파탄에 이르자 신라 정부에 반기를 들고 독자적 세력을 행사하는 호족이 등장했고, 급기야 후삼국 시대가 열리었다. 후삼국 시대란 신라 외에 견훤의 후백제(900년), 궁예의 후고구려(901년)가 다투던 때를 말한다. 강진에도 왕지본(王池本)이라는 호족이 있었는데, 그는 광주나 전주에 둥지를 튼 후백제 편이 아니라 경기도나 강원도를 본거지를 한 후고구려(나중에 왕건에 의해 고려로 바뀜) 편이었다. 왕지본은 중국 당나라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선종 승려 형미(逈微)를 강진 무위사에 머물게 했다. 형미는 보림사 가지산문의 체징(體澄)에게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는데, 귀국 후 무위사에 머물며 사찰을 크게 중창하기도 했다. 당대 최고 지식인이었던 형미는 왕건의 스승이 되어 그를 따라 수도 철원으로 가 왕건을 변호하다 궁예로부터 죽음을 당한 인물이다. 후삼국 각축전 속에서 강진 사람들은 고려를 선택하여 지원했다. 후삼국은 고려에 의해 936년에 통일되었다. 따라서 통일에 일조한 강진 사람들의 활약이 고려 시대에 기대될 수밖에 없었으나, 그것은 희망 사항에 불과했다. <광주교대 교수/ 역사교육학>  칠량 영계리 고인돌군이다. 강진에는 이처럼 고인돌이 집단으로 있는 곳이 108개소에 이른다. 이는 청동기 시대 강진 사람들이 상당한 세력의 정치 집단을 이루고 있었음을 나타내 주고 있다. 강진의 고인돌은 848개강진 곳곳에 분포되어 있는 청동기 시대의 거대한 고인돌은 강진 사람들이 당시에 상당한 세력의 정치 집단을 만들었음을 알려준다. 총 108개소에 848여 기가 강가와 바닷가 지역에서 조사⋅보고되었다. 공부하는 책상을 닮았다고 하여 고인돌을 ‘책상바위’라고 한 사람이 있었다. 군동면 금곡 마을 사람들에게는 힘센 장군이 들어서 던져 떨어졌기 때문에 ‘장군바위’로 알려졌다. 그래서 그런지 적지 않은 수가 도로 공사나 경지 정리 때에 훼손되거나 사라졌다. 일부가 발굴되었는데, 군동면 파산리와 작천면 야흥리 고인돌에서 반달모양의 돌칼, 가락바퀴, 돌 화살촉, 청동 무기가 출토되었다. 이곳이 농경이 발달하고 무장세력이 있었던 곳임을 알려준다. 칠량면 영복리 고인돌에서 민무늬 토기, 붉은 간토기, 화살촉, 갈판, 가락바퀴, 그물추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어 높은 수준의 문화와 북부 지역과의 문화교류가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도암면 지석리에는 49여 기가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니, 그래서 마을 이름이 생긴 것 같다. 고인돌을 한자로 지석묘(支石墓)라고 하기 때문이다. 청동기 시대의 대규모 주거지도 도암면 계라리 양유동, 성전면 수양리 수암마을 등 강진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 무렵 강진 지역은 완전히 족장 사회로 진입하였음에 분명하다.  < 저작권자 강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