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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삶]도산서당 직접 설계하고 조경에도 안목이 깊었던 ‘건축가’ 퇴계 이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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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당, 선비들의 이상향을 짓다 김동욱 지음 | 돌베개 | 320쪽 | 2만3000원
퇴계 이황은 나이 31세 되던 1531년 생애 첫 집을 장만한다. 첫 부인과 사별하고 두 번째 부인을 맞아들인 이듬해였다. 7남1녀 중 막내였던 퇴계는 첫 집을 마련함으로써 홀어머니와 형제들로부터 독립했다. 그는 출생지인 안동 도산의 온혜리 본가에서 젊은 날을 보냈으며 결혼 후에도 그곳에서 10년을 더 살았다.
퇴계는 자신의 첫 집을 ‘달팽이집’(芝山蝸舍·지산와사)이라 불렀다. 당호에서 경제사정은 넉넉지 못하지만 안분자족하겠다는 삶의 철학이 배어난다. 그는 이 집에서 전처 소생 두 아들 및 부인과 지내며 학문에 정진했다. 그는 이 집에서 15년을 살았다. 그 사이 과거에 급제했으며 한양에서 벼슬살이를 했다.
한양 벼슬살이에 환멸을 느낀 퇴계는 46세 때 병을 핑계로 고향으로 내려온다. 이 때 그는 두 번째 집을 짓는다. 토계리에 지은 양진암(養眞庵)이 그것이다. 자호 퇴계는 토계리에서 따온 것이다. 이듬해에는 죽동에 터를 구해 집을 짓고 이사했다. 50세 되어서는 죽동 위쪽에 한서암(寒棲庵)을 건축했다. 서재를 겸한 서당이었다. 제자들이 몰리면서 한서함이 불편해지자 이듬해 새로 서당을 세웠는데, 계상서당(溪上書堂)이 그것이다.
퇴계는 청장년기 20년 사이에 최소 4번 집을 지어 이사를 했다. (다섯번 거처를 옮겼다는 기록도 있다.) 물론 고향 안동에서만 장만한 집을 말한다. 여러 차례 출처(出處·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남)를 반복한 그는 서울에서 집을 빌려 생활하기도 했다.
퇴계 최후의 거처는 도산이었다. 퇴계는 57세에 그곳에 터를 장만하고 5년의 준비과정을 거쳐 건축물을 완성한다. 오늘날까지 원형이 보존돼 있는 도산서당이 그것이다. 도산서당은 퇴계가 말년 10년 동안 거처하며 학문을 닦고 후학을 길렀던 퇴계 최후의 안식처이다. 퇴계 사후에는 제자들이 서당 주위에 사당과 강당, 서고 등을 지어 도산서당이 도산서원으로 확대되었다. 현존하는 서원 가운데 경내에 독서하고 제자를 가르쳤던 서당을 갖춘 곳은 도산서원이 유일하다.
도산서당은 퇴계가 건축한 최후의 득의작이다. 퇴계는 도산서당을 짓기 위해 설계도를 직접 그렸다. 그가 이숙량에게 보낸 편지에서 도산서당 구상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재(齋)를 반드시 서쪽 정원을 마주보도록 한 것은 아늑한 정취가 있도록 함이며, 그 나머지 방, 부엌, 곳집, 대문, 창 등도 모두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니, 그 구조가 바뀌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남쪽 변의 3칸의 들보와 문미의 길이를 8자로 하고 북쪽 면에 4칸의 문미는 남쪽과 동일하게 하되…”(‘1558년 이문량에게 보낸 퇴계의 편지’)
퇴계의 이 같은 구상이 도산서당에 그대로 구현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퇴계가 도산서당 건축에 앞서 오늘날의 건축설계도와 같은 ‘도형’(圖形)을 만들었음이 분명하다. <퇴계선생연보>에는 퇴계가 죽동에 집을 지을 때에도 “아들 준에게 편지를 보내 그림에 따라 집을 짓도록 명하였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앞서 집을 지을 때에도 설계도를 그렸던 것으로 보인다.
도산서당은 온돌, 마루, 부엌의 3칸으로 지어진 작은 건축물이다. 3칸을 모두 합해도 동서 길이가 8m가 채 되지 않는다. 퇴계는 ‘도산기’라는 도산서당 편액에서 “즐기며 완상하니 종신토록 싫증이 나지 않는다”며 건물에 크게 만족해 했다. 그는 도산서당을 통해 자신이 꿈꾸던 건축에 대한 이상이 실현됐다고 여겼다.
퇴계가 일평생 집에 집착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꿈은 “산수에 묻혀 공부에 전념하려는 것”이었다. 퇴계가 거처를 옮겨가며 집짓기를 계속한 것은 이상적인 집을 마련하려는 그의 간절한 염원을 뿌리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도산서원은 책을 읽고 잠을 잘 수 있는 완락재(玩樂齋)와 공부로 피로한 심신을 달랬던 휴식 공간인 암서헌(巖棲軒)으로 구성돼 있다. 건물 주위에는 연꽃, 샘, 화단 등을 둘러 건축과 조경이 어우러지도록 했다.
전통건축을 탐구해온 저자 김동욱 교수(경기대)는 건축가로서의 퇴계 이황을 조명하며 도산서당의 의미와 가치를 재발견한다. 저자는 “이황이 도산에 집을 지을 때 첫 구상에서는 건물의 좌향이나 실(室)의 구성은 물론 기둥 사이의 치수까지 명시했다”며 “도산서당을 짓는 과정에서 이황이 한 일은 지금의 건축가 역할과 흡사하다”고 말했다. 이상적인 집을 추구했던 퇴계는 건축에 관심이 많았다. 건축물을 직접 설계했을 뿐 아니라 정원 등 조경에도 안목이 깊은 통합형의 지식인이었다.
퇴계 이황은 그간 사상가, 철학자로 집중 조명을 받아왔다. 저자는 퇴계가 남긴 편지와 시 등을 통해 퇴계가 품었던 건축의 이상을 추적하며 퇴계 이황을 ‘16세기의 빼어난 건축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저자는 “도산서당은 퇴계가 송나라 주자가 꿈꾸었던 이상향을 조선의 현실에 맞게 건축으로 재창조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황이 생전에 다섯차례 이상 집을 옮기고 서당을 지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재산 증식을 위한 퇴계의 노력과 처갓집의 상속 등이 토대가 됐을 것이라는 분석도 흥미롭다. 고건축, 역사, 전통 문화, 퇴계 이황에 대한 다양한 정보가 잘 버무려져 있어 건축 인문학 서적의 모범이라고 부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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